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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악필이다. 내 글씨를 보는 사람들 대부분이 흠칫 놀랄 정도로 악필이다.

글씨를 처음 배울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나의 부친은 달필이셨다. 마치 펜글씨 교본의 모범 예시처럼 글씨를 잘 쓰셨다. 지휘자가 지휘하듯 휘갈겨 쓰셨지만 아주 멋지고 힘찬 필체를 남기셨다.

그러한 영향 때문이었는지 여느 초등학생들처럼 연필로 또.박.또.박 글씨를 쓰는 것은 왠지 폼나지 않은 행위로 보였다. 그래서 또래 친구들과 달리 부친처럼 글씨를 휘갈겨 쓰는 흉내를 냈다. 걸음마도 못 뗀 녀석이 뜀박질부터 하려고 했으니, 제대로 된 글자체를 형성 할리 만무했다.

 

아무튼 나는 악필이다.

 

출판 편집자로 일하다 보면 원고 교정을 하는 일이 참으로 곤욕이다. 오탈자를 찾아내는 것보다 원고 위에 나의 악필로 교정을 봐야 하는 것이 힘들었다. 최소한 교정된 원고를 건네받은 디자이너가 무슨 글자를 적어놓은 것인지는 알아봐야 할 것 아닌가?

상황이 이렇다 보니, 출판 편집자들이 걸리기 쉽다는 필기구 수집병에 걸리지는 않았다. 일단 필기 자체가 싫다 보니...

 

그러던 어느 날, 어느 록밴드의 레코딩 현장을 담은 다큐멘터리에서 기타리스트가 기타를 끌어안고 만년필로 악보를 적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그만 만년필에 꽂혀 버렸다. 보통 이럴 때는 기타에 꽂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나는 이미 기타를 치고 있었으므로 내가 가지고 있지 않던 만년필에 꽂혀 버린 것이다.

만년필에 문외한이었던 나는 그 만년필의 종류까지는 알아내지 못했다(지금도 모른다).

 

다음 날 퇴근길에 곧장 대형서점 필기구 코너로 가서 만년필을 탐색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만년필은 나의 예상보다 0이 하나 더 많았다. 만년필이 그렇게 비싼 필기구인지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작 500원짜리 수성펜으로 원고 교정을 보던 나에게는 너무나 저항감이 큰 가격대였다.

그렇게 진열대를 훑고 지나가다가 한 녀석이 눈에 걸렸다. 일단 아주 익숙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으며, 내가 예상하던 가격대의 녀석이었다.

왠지 지구를 지켜야만 할 것 같은 그 녀석의 이름은 벡터(Vector)였다. 미국의 파카(Parker)에서 만들어진 벡터 만년필.

 

 

케이스와 동봉된 보증서, 카트리지까지 여전히 보관중이다

 

 

그 녀석을 샀다고 만년필 수집병에 걸리지는 않았다. 사실 아직도 만년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저 잉크를 넣어야 하고 화살촉처럼 생긴 닙을 종이에 대고 사용한다는 것 이외에는.

수집용이 아닌 업무용 도구로 장만한 녀석이기에 아주 험하게 사용했다. 여기저기 인터뷰며 취재현장의 메모용으로 떨어트리고 굴러다니면서 몸통(필기구의 몸통을 배럴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최근에야 알았다)이 깨지고 3M 매직테이프로 동여 멘 채로 여전히 현역으로 활약하고 있다.

 

 

 

이 녀석은 구입한 지 13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다. 요즘은 직접 교정볼 일이 많지 않아 매일같이 쓰고 있진 않지만, 잊을만하면 잉크를 넣고 상태를 점검하면서 언제든 다시 현역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관리해주고 있다.

배럴을 칭칭 감고 있는 테이프는 전장에서 입은 상처가 아문 흉터를 가진 퇴역군인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금이 간 배럴을 감싸고 있는 매직테이프

 

 

아마도 지금 당장 내 인생길에 휘몰아치고 있는 폭풍이 잠잠해지면, 이 녀석과 함께 악필 교정에 도전해볼 생각이었다. 정말이지 그 녀석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 녀석은 [Pen에 관한 이야기]-제4부에 등장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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